지금 아이티에 절실한 것은 무장군인이 아니라 구호품과 의료진, 그리고 인간 존엄의 회복이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으로 부풀었던 모두의 가슴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지난 13일, 중남미의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서는 강도 7.0의 지진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완전히 초토화되는 대재앙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이미 확인된 것만도 7만 5천 명, 그 외에도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었는지는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할 지경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잃은 슬픔은 물론이거니와 식량과 물, 잠자리, 의료, 위생시설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비극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아이티 민중들이 겪고 있는 참상에 가슴아파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진정어린 마음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목격한다는 것은 참사 소식만큼이나 참담하고, 분노를 넘어 서글프기까지 할 정도이다. 바로 한국정부를 비롯한 각국 정부의 자기 이해관계에 따른 파병 경쟁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미국 정부는 지진 참사가 전해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해병대 병력 약 2,200명을 아이티로 긴급 배치한 것을 포함해 지금까지 약 1만 1천여 명의 군 병력(기존에 주둔하던 병력 포함)을 아이티 전역과 그 인근에 전개했으며, 캐나다도 약 2천 명의 군 병력과 2척의 군함을 현지로 급파했다고 한다. 또한 기존의 유엔 평화유지군인 유엔아이티안정화지원단(MINUSTAH)에서 가장 많은 1,266명의 군 병력을 파병했던 브라질도 추가 파병을 계획 중에 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차원에서도 현재의 9천 명 수준인 아이티 평화유지군을 1만 2천 5백 명 선으로 늘리겠다고 결의했다. 이에 뒤질세라, 한국 정부까지도 유엔의 요청을 구실삼아 한국군을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아이티에 서둘러 파병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다.
이러한 각국의 파병 경쟁에 대해,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 아이티에 전쟁이라도 난 것인가? 현재 아이티 국민들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무장한 군인들과 기관총을 탑재한 장갑차인가, 아니면 식량과 물, 의약품과 의료진, 파괴된 수도와 전기 등의 사회기반시설의 복구, 안전한 잠자리 등인가? 그에 대한 답은 누가 보더라도 자명할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굶주린 사람들이 점점 미쳐가고 있”(경향신문 1월 18일자)는 반면 아이티 정부의 치안 유지와 행정 능력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 치안과 질서를 회복하고 구호품 배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무장을 갖춘 외국의 군인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달되는 현상만을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기 보다는,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아이티의 미래를 위해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해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자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바로 이 시각, 아이티 국민들을 심리적 공황 상태로 내모는 원인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여진에 대한 공포와 극심한 식량, 식수, 의료 부족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보다 더한 분노와 절망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세계 각국에서 속속 쏟아져 들어온다는 구호품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반면, 거리에는 파란 헬멧을 쓰고 총으로 중무장한 외국 군인들이 고압적인 태도로 주민들 통제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게다가 미 해병대원들은 이 와중에 마치 군사작전 하듯 헬기를 타고 생뚱맞게 대통령궁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티 국민들은 스스로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 저들은 우리들 생명보다는 자기네 정치적 잇속에만 관심이 있구나’하는 결론 말이다. 그 다음은 각자 알아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약탈과 구호품을 둘러싼 폭력과 혼란, 무질서로 이어지는 연쇄작용을 일으키는 구조인 것이다.게다가, 아이티 국민들은 이미 외국 군대에 의해 자신들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짓밟히고 훼손되는 경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다. 즉, 91.8%라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 당선된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2004년 2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에 의해 나라 밖으로 쫓겨난 뒤, 지금까지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복귀를 통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막아온 것은 다름 아닌 유엔이었다. 또한, 과거 군부정권 시절 인권침해로 악명 높았던 인물들을 (이번 지진사태 때 그 무능함을 철저히 드러낸)아이티국립경찰로 등용하고 훈련시킨 이들 역시도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군인들로 구성된 유엔평화유지군(MINUSTAH)이었으며, 그들은 풀뿌리 지역자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판미 라발라스(Fanmi Lavalas)> 조직 구성원들과 무고한 주민들을 아이티경찰이 체포, 고문, 살해하는데도 수수방관해왔다. 심지어, 2005년과 2006년 유엔평화유지군이 직접 시떼 솔레유 빈민가에서 수십 명을 학살한 것을 비롯해 인권침해의 가해자로 둔갑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외국 군대를 아이티에 주둔시키면 이른바 치안과 질서를 회복하고 분노와 절망에 빠진 민심을 다독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뿐만 아니라, 작년 말 대한민국 국회가 파병에 대한 국회의 사전 동의를 규정한 헌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상시 평화유지군 부대의 설치를 위한 ‘국제연합 평화유지 활동 참여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킬 때 그 근거로 제시됐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강화나 경제적 이익 등의 이유로 파병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이티 국민들에 대한 모욕이자 인간성 상실 그 자체일 것이다.
따라서, 현재 파병을 ‘적극 검토’ 중이라는 한국의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아이티의 미래와 국민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돕고 싶다면(아니 도와야 한다), 군대의 파병이 아닌 다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갖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먼저 아이티의 지역사회와 접촉할 것을 권한다. 지진 때문에 잠시 그 존재가 잊혀져있지만, 아이티에는 지금도 지역사회를 근간으로 활동하는 수많은 풀뿌리 조직과 활동가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기네 지역과 사람들을 잘 알고 있으며, 외부에서 전해진 구호품과 의료진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배분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아이디어와 정보를 갖고 있다. 이는 비단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유엔과 각국 정부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제안이자 방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각국 정부와 유엔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입장을 전한다. 아이티에 대한 파병 경쟁을 즉각 중단하라. 그리고 아이티의 주권과 존엄, 인권을 보장하는 바탕 위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원 방안을 신속히 집행하라.
2010년 1월 22일
반전평화연대(준)